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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사회는 공정과 양극화가 화두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습니다. 노력을 통한 계층 이동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외친 결과 아이러니하게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고, 서민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을 짓밟혔습니다. 결국 소득 양극화가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던 중산층이 줄줄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절망감과 무력가멩 휩싸인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세대 간, 계층 간, 심지어 성별 간의 갈등까지 심해졌습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불평등이 생기는 원인 중 하나로 능력주의가 꼽히고 있습니다. 능력주의란 열심히 노력해서 능력을 쌓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빈익빈 부익부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가혹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능력주의의 함정에 대해 다룬 마이클 센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입니다. 이 책은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 주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노력이 꼭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뛰어난 영웅들이 참 많습니다. 미국의 인기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는 매년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입니다. 그런데 르브론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노력이 아니라 행운입니다. 이렇듯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도 행운일 수 있습니다. 또한 농구에 대한 재능을 크게 보상받을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 역시 행운입니다. 어떤 부모를 만나 어떤 유전자와 어떤 환경을 제공받느냐의 문제는 모두 명백한 행운의 영역입니다. 물론 재능뿐 아니라 르브론이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재능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된 훈련을 거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르브론만큼 열심히 연습하는 농구 선수는 많지만 모두가 최고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개인에게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공은 노력만으로 거머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노력만을 강조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지켜 경쟁하면 능력과 노력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다고 믿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스포츠에서든 인생에서든 내 능력으로 성공했다고 믿고 싶지 운으로 얻었다고 여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훈련한 운동선수라고 금메달을 딸 수 있는 게 아니고 가장 많이 노력한 노동자가 가장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주의 사회는 결국 노력보다는 성과를 중시합니다.
능력주의는 빈부격차에 관심없다
능력주의는 빈부 격차가 벌어지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 강조합니다.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을 강조하며 결국 불평등을 정당화하게 만듭니다. 미국의 아메리칸드림은 모든 이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는 곳이며, 노력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합니다. 하지만 이 말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미국인은 성인이 된 뒤에도 가난하게 삽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 20명 중 1명만이 부자가 됐고, 대부분은 중산층도 되지 못합니다. 또한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생 3명 중 2명은 소득 상위 20% 안에 드는 가정 출신입니다. 재산뿐 아니라 학력까지 대물림된다는 게 마이클 샌델이 말한 현실입니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불평등 연구소가 발표한 세계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소득 상위 10%가 차지하는 소득은 하위 50%의 소득보다 14배나 많습니다. 이는 유럽 국가들 2배에 이르는 큰 수치입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과대평가하지만 그 외 운의 영역은 과소 평가합니다. 이를테면 특권의 세습이나 특혜, 부모의 배경이나 유전자, 부의 상속과 같은 부분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개인의 능력만으로 행운의 영역을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능력주의가 심해져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개인의 능력만으로 계층 사다리를 올라타긴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능력주의는 공정함을 상실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능력주의적 오만과 패배감
마이클 샌델은 세계에서 가장 입학이 어려운 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대학교의 교수입니다. 그가 보기에 능력주의의 제일 큰 결함은 승자의 오만함을 정당화하고 패자들에게 패배감을 준다는 데 있습니다. 샌델은 하버드 대학교에 합격한 학생과 합격하지 못한 학생의 능력이 거의 차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하버드나 스탠포드 같은 일류 대학에 매년 지원하는 학생이 4만 명 이상이고, 이 중 2~3만 명은 누가 입학하든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능력 있는 학생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합격자들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지금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반면, 불합격자들은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패배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는 유전적 요인이나 그들을 둘러싼 환경 등 행운의 요소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마이클 샌델은 학생들이 입학 후에도 강박적 완벽주의, 극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학생들은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 가치 있는지 성찰해야 할 시기에 숨 막히는 경쟁 속에서 점수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결국 대학 입시 경쟁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안겨줍니다.
대학 입시를 제비 뽑기로 해결한다?
이에 마이클 샌델은 대학 입학에 제비 뽑기를 제안합니다. 입학 자격을 충분히 갖춘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그 후 선발 과정은 운에 맡기는 겁니다.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마이클 샌델은 진지했습니다. 수많은 학생 사이에서 극소수의 합격자를 골라내는 건 확실하고 공정할까요? 만 18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누가 더 훌륭한 경력을 쌓았는지, 누가 더 좋은 능력을 가졌는지 완벽히 알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학생이 가진 미래의 가능성을 누가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이 제비 뽑기에는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어차피 운으로 뽑힐 거면 아무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샌델 교수는 1차 관문 기준을 잘 세우면 그런 우려를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의심되면 기존 선발 방식대로 뽑힌 학생과 제비 뽑기로 선발된 학생들의 졸업 성적 차이를 비교해 보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 시도는 입학처장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1960년대 말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실제로 이 실험을 실시하려고 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명문대의 명예가 추락하면 어떡하냐는 말에 샌델은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극소수 학생들을 명문대에 몰아넣은 결과 불평등이 심해지고, 학력이 대물림 됐을 뿐 대학의 교육 수준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문대 입학이 미래의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하는 장이 되기 위해선 대학의 가치나 명예가 떨어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겁니다. 마이클 샌델이 제비 뽑기로 학생을 뽑자고 제안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능력주의를 너무 믿지 말자는 겁니다. 능력주의가 성립하려면 모든 외부 요인을 배제한 채 개인의 능력만이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합니다. 그러나 재능과 노력에는 객관적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에 많은 시간을 쓰는 학생과 아낌없는 지원, 종일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은 출발선부터 다릅니다. 이렇게 출발선이 다른 사람들을 같은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이 능력주의의 핵심적인 함정입니다. 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평가하는 일이란 굉장히 복잡하고 그 결과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대학은 학생들이 도덕적이고 민주적으로 성장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대학 입시의 일정 부분을 제비 뽑기라는 운에 맡긴다면 능력주의의 폭정에 맞설 수 있게 됩니다. 합격자들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운도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합격자는 오만함에 빠지지 않고, 불합격자는 패배감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능력주의가 주는 상처 없이 대학에 입학한 젊은이들이 더 기꺼이 지적인 모험을 즐길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공동선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정의란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는 사회와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공동선을 강조합니다. 엘리트 계층이 능력주의의 오만함에 빠져 공동선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면 결국 경제 구조를 바꾸고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개인의 성취만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사회 구성원인 개인을 공동체에서 떨어뜨리고 사회구성원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들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는 보편적 도덕성을 강조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조건의 평등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덜 성공한 사람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기 자리에 만족하고 사회에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사회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며,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꾸준히 학습하고, 동료 시민들과 만나 공적인 문제를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의 관건은 시민들이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함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선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합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니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듣고 타협하고 틀림이 아닌 다름을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능력주의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공정의 탈을 쓴 능력주의는 불평등과 차별이라는 큰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타인은 차별이 되고, 혐오로 진화하며, 내부의 연대와 통합은 더 어려워집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성공에는 개인의 노력뿐만이 아니라 행운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공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겸손의 미덕도 갖추자는 겁니다. 또한 노력에 비해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함부로 패배감,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통해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됐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에서도 옛날 과거제부터 강화되어 온 K능력주의에 관한 논의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추세이니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